2026년 4월, 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 제조업의 APC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건 내 커리어의 가장 큰 변곡점이었다.
아직 제조업의 ‘제’ 도 모르지만, 현장에 있다 보면 IT 업계와는 사뭇 다른 결을 실감하곤 한다. 일반적인 IT 환경에서 레거시 시스템은 하루빨리 리팩토링해야 할 ‘기술 부채’로 간주되지만, 제조업은 그 접근 방식부터 다르다. IT에서는 기술 부채를 방치하는 것이 곧 큰 리스크가 되지만, 제조업에서는 오히려 기술 부채를 건드리는 행위 자체가 리스크가 되기 때문이다. 설비나 소스 코드 하나를 함부로 바꾸는 것조차 매우 위험한 결정이다.
기술 부채를 해결하려다 공정 과정에 차질이 생겨 공장 가동률이 조금만 떨어져도 그 손실은 막대하다. 제조 납기를 맞추지 못해 발생하는 기업 간 타격은 IT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제조업은 기술 부채를 무작정 걷어낼 수 없는 무거운 제약 아래 있는 셈이다.
LG에너지솔루션의 생산라인은 모두 배터리 중심이다. 최근 AI 산업의 폭발적 성장으로 데이터센터용 ESS 배터리 생산이 활발해졌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 경제권은 AI 골드러시 중이다. 2025년 상반기 데이터센터 투자는 전년 대비 37% 급증했고, 관련 서버 및 전력 시스템 선적량은 64% 폭발적으로 늘었다.
거대한 데이터센터는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한다. 여기서 가상의 소프트웨어 세계와 현실의 물리적 생산이 강력하게 교차한다. 끝없이 확장하는 AI 인프라를 지탱하기 위해, 역설적이게도 이 투박한 배터리 생산 라인은 한순간도 쉬지 않고 돌아가야 한다.
내가 속한 프로젝트는 APC(Autonomous Process Control, 자동 공정 제어)다. 설비 및 계측 데이터를 활용해 실시간으로 자동 보정을 수행하는 시스템이다.
배터리 성능의 핵심인 전극 공정은 극도의 정밀성을 요구한다. 현재는 생산 중간중간 샘플을 채취해 물리적으로 계측하는데, 불량이 발견되었을 때는 이미 상당량의 불량품이 라인을 통과해 큰 손실(Loss)이 발생한 뒤인 경우가 많다.
제조업에서 손실은 기업의 생존과 직결된다. 만약 코터나 프레스 장비에서 쏟아지는 실시간 설비 데이터를 AI 모델에 학습시킨다면, 라인을 멈추고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품질을 가상으로 예측할 수 있다.
이 예측 데이터는 APC 시스템의 입력값이 된다. APC는 가상 계측 결과를 실시간으로 받아 품질 기준에서 벗어날 징후가 감지되면, 사전에 파라미터를 자동 보정한다.
현장에서는 기술 부채를 직접 걷어내는 시도 자체가 운영 리스크를 키우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한다. 따라서 업계는 무리하게 부채를 해체하기보다, AI 알고리즘을 통해 리스크와 로스를 최적화하는 방식으로 기술적 한계를 우회하며 시스템을 고도화하고 있다.
현재 글로벌 배터리 생산 1위는 중국의 CATL이다. 거대한 내수 시장과 강력한 원자재 공급망을 무기로 전 세계 점유율 1위를 지키고 있다.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시장을 장악하는 중이다. 중국 정부의 전폭적 지원 아래 광물 공급망을 수직계열화하여 압도적인 원가 절감을 이뤘고, 저렴하고 수명이 긴 LFP 배터리를 주력으로 삼아 보급형 전기차 시장을 독점했다.
이에 대응하여 LG에너지솔루션은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겨냥해 북미 현지에 대규모 합작법인을 세우며 강력한 공급망 현지화 전략을 실행 중이다. 얼티엄셀즈(Ultium Cells)는 LG에너지솔루션과 GM의 합작법인으로, 현재 오하이오(1기)와 테네시(2기) 공장을 가동 중이며 미시간 랜싱(3기)까지 확장하고 있다.
인프라 경쟁의 끝에서, 진짜 부는 다운스트림(하류)에서 완성된다. 15년 전 물류 혁명을 이끈 컨테이너화도 비슷했다. 당시 컨테이너화는 엄청난 사회적 파급력을 가졌지만, 정작 신생 부를 창출하기보다는 기존 구조를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그 혁신은 수출 경제와 대형 유통 모델의 기반이 되었고, 엄청난 부는 결과적으로 다운스트림에서 창출되었다.
AI 역시 같은 패턴을 보인다. 실제 인프라를 소유하는 소수보다는, AI로 인해 구조적 변화를 일으키며 부가가치가 재개편되는 곳에 더 큰 기회가 있다. 핵심은 AI의 다운스트림 분야에 투자될 때 비로소 이익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경제의 기반이 제조업인 만큼, 내가 매달리고 있는 APC 프로젝트와 배터리 제조 현장이 AI 산업 기반 다운스트림 혁신의 전선이 되길 기대한다.